긴즈버그의 말

🔖 페미니즘에 대한 가장 간단하면서도 본질을 포착하는 설명은, 말로 토머스가 노래한 <자유롭게 너와 내가 되자>가 아닐까 싶다. 여자아이라면 의사건 변호사건 아메리카 원주민 추장이건 원하는 일은 무엇이건 자유롭게 하라. 남자아이라면, 그리고 그 아이가 가르치고 돌보는 일을 좋아하고 인형을 갖고 싶어 한다면 그것 역시 괜찮다. 페미니즘 개념은 우리 모두 어떤 재능이 있건 각자의 재능을 자유롭게 개발할 수 있어야 하고 인위적인 장애물 — 단연코 하늘이 내린 것이 아닌 인간이 만든 장애물—에 가로막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.

🔖 법은 사회를 위해 존재한다. 따라서 사회의 경험이 법에 반영되는 것은 당연하다. 법이 사람들의 생활 방식에 관계없이 무미건조하게 논리적이라면, 그것은 성공적인 제도로 자리 잡지 못할 것이다.

🔖 이집트에서 탈출한 우리 조상과 달리 기적적인 사건이 우리의 앞길을 열어줄 것 같지는 않다. 편견과 억압이라는 물을 빼내려고 할 때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수단 — 법률의 지혜, 제도의 품격, 이성적 사고, 공감적 배려 — 에 기대야 한다. 앞으로 계속 나아가고자 하는 항구적 자극으로서, 이 세상에서 영원히 추방해야 할 악에 대한 우리의 생생한 기억에도 또한 기대야 한다. 보다 정의로운 세상을 향한 기나긴 투쟁 속에서 우리의 기억은 가장 강력한 무기 가운데 하나다.

🔖 로 대 웨이드 사건 판결이 뒤집히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한다 하더라도 많은 주가 예전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. 그것은 곧, 비행기나 기차를 타고 낙태가 합법인 주로 이동할 경제력이 있는 여성은 문제될 게 없다는 뜻이다. 연방의회나 주 의회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상관없다. 낙태술이 가능한 주들이 있고, 비용을 댈 수 있다면 어떤 여성이든 낙태술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. 판결이 뒤집힘으로써 영향을 받는 유일한 여성들은 비용을 마련할 수 없는 여성들뿐이다.

🔖 누가 가정과 일을 모두 가지는가? 남자? 여자? 내 인생을 돌이켜보면 나는 그랬던 것 같다. 가정과 일을 모두 가지긴 했지만 한순간에 가능했던 일은 아니다. 마티가 젊은 변호사 시절 로펌의 파트너 변호 사가 되기 위해 사다리를 오르는 동안, 가정과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주로 내 몫이었다. 1970년대에 내가 ACLU의 여성 인권 사업을 시작했을 때 마티는 변화의 가능성에 열렬히 호응했고 나의 가장 든든한 지원자가 되었다. 그 후론 균형추가 반대로 옮겨갔다. 삶의 다른 시기에 서로를 보완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.

🔖 “판사는 그날의 날씨가 아닌 시대의 기후를 고려해야 한다.” 법원은 사회의 변화에 맞춰 “반응하는 기관”이기 때문에, 현실에 대한 고려 없이 문자 그대로 법전을 해석하면 안 된다는 “원전주의자” 긴즈버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. 역차별 주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종차별은 근절해야 할 문제라는 것, 여성 역시 남성처럼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능동적 주체라는 것,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동성인지 이성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. 시대정신을 읽고 있기에 일관되게 추구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닐까 싶다.

“편향을 밝히는 게 중요하다. 나는 사람들을 세뇌하려고 애쓰지 않지만, 나 자신을 중립적인 사람으로 제시하지도 않는다.” 자신의 생각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중립적이라는, 그래서 절대적으로 옳다는 믿음은 아집과 독선을 낳게 마련이다. 상대 의견을 무시한 채 대립으로만 치닫는 우리 사회가 귀담아들어야 할 메시지다. 긴즈버그는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늘 되돌아보고 (더불어 자신의 생각이 편향되었음을 인정하면서)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기 위해 (물론 상대의 생각도 편향되었음을 인정하면서) 노력한다. 올바른 동시에 단단한 의견을 내는 길이다.